우연의 가면을 쓰고 '존엄'을 위조하는 무신론자들
오늘날 무신론적 지성주의는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를 배제하고도 인류가 충분히 도덕적일 수 있으며, 오히려 신앙으로부터 독립할 때 인간의 존엄이 완성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지성 없는 물리적 법칙'과 '우연의 축적'으로 규정하면서, 동시에 그 결과물인 인간에게는 고귀한 가치와 권리가 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치명적인 자기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존엄은 논리적 근거를 상실한 채 창조 질서에서 몰래 빌려온 ‘위조된 가치’에 불과하며, 그 종착지는 인류를 억압하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감옥이기 때문이다.
먼저, 무신론이 전제하는 '우연'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물질'로 격하시킨다. 인간이 목적 없는 진화가 낳은 우연한 부산물이라면, 고귀한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물질적 확률이 빚어낸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주전(主前)부터 이어진 기계론적 우주관 안에서 인간은 고도의 유기체일 뿐, 길가의 돌멩이보다 본질적으로 더 가치 있어야 할 논리적 이유가 없다. 이러한 인간의 물질화는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라는 비극적 열매를 맺어왔다. 하나님이라는 절대적 심판자를 제거한 자리에 국가나 당이 들어앉아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이 곧 선"이라고 선포할 때, 개인의 존엄은 혁명의 부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신론은 결국 '국가의 신격화'를 정당화하는 논리적 발판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무신론적 해체주의는 현대에 이르러 성(性) 정치학과 결합하며 창조 질서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동성애를 비롯한 젠더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설계(Design)를 따르는 피조물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성별과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율적 신(神)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내 삶의 주인은 나"라는 무신론적 오만의 극치다. 성경이 명시한 남녀의 구별과 가정의 원리를 억압적 구조로 규정하고 해체하려는 시도는,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계급을 나누어 투쟁했던 방식과 궤를 같이한다. 절대적 도덕 기준을 파괴하고 주관적 욕망을 최고의 선으로 등극시킨 자리에는 인권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전체주의적 검열만이 남게 된다.
결국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도덕과 인권은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개념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들은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의 법칙을 믿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모순된 가치를 주장한다. 하지만 절대적 기준인 하나님을 제거한 자리에서 도덕은 한낱 가변적인 모래성에 불과하다. 그들이 누리는 도덕적 평안은 자신들이 부정한 하나님이 심어 놓은 양심의 잔상을 마치 자신의 독창적인 가치인 양 위조하여 사용하는 지적 기만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지운 자리에 세워진 '인간 자율성'이라는 수식어는 화려해 보이나 실체 없는 신기루다. 무신론자들이 쓰고 있는 '우연의 가면'을 벗겨내면 드러나는 것은, 창조주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입법자가 되어 인류를 유토피아라는 미명 아래 다시 노예화하려는 뒤틀린 자화상이다. 인간의 존엄은 스스로 위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를 목적 있게 빚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설계도 위에서만 비로소 실재하는 가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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